아르메니아 대학살: 비극의 경험에서 깨달은 평화의 메시지

2023. 12. 31. 02:58역사적이야기

반응형

오늘 포스팅은 제노사이드 사례, 아르메니아 대학살입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가장 잔인하고 끔찍했던,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비극 중 하나입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고통스러운 학살, 강제 이주, 식민지화, 강제노동 등의 가혹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학살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고, 여러 아르메니아인들은 기아, 질병, 학살로 목숨을 잃었으며, 이는 당시의 인류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가족들은 잔혹한 방식으로 가족들이 학살당한 것을 목격하고, 그들의 고통과 비참함은 인류사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과 파괴력을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인류 최악의 범죄, 제노사이드 사례인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우리가 전쟁과 폭력을 근본적으로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합니다.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분쟁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은 지역적 갈등의 결과입니다. 이들 전쟁은 무차별적인 폭력과 인도주의적인 행동, 민간인들의 희생을 초래하여 인류에게 끊임없는 비극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을 통해서 저는 "전쟁은 인류의 진보를 차단하고, 평화의 꿈을 잠재우는 비극의 상징입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숨겨진 참혹한 역사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또는 Ermeni Soykırımı,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오스만 제국 또는 튀르키예 정부가 오스만 제국 내 소수 민족으로 살아온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적인 살해 사건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튀르키예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를 진행하며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사건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첫 번째로 조직적인 집단학살 사건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튀르키예 정부는 이를 강제 이주에 따른 희생으로 설명하며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갈등하는 시각과 해석의 차이

  1.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오스만 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 대규모 학살이 있었음. 두 차례의 학살로, 첫 번째는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압둘 하미드 2세 통치 시기에 발생했고, 두 번째는 1915년부터 1916년까지 통일파 정권으로 인해 발생했었습니다.
  2. 이러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은 수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했으며, 이는 튀르키예 정부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한 결과로 해석됨. 아르메니아인들은 집단학살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조직적 탄압으로 비유하며, 매년 4월 24일은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서 국제적 비판 캠페인이 이뤄졌습니다.
  3. 튀르키예 정부는 이를 강제이주로 인한 희생으로 설명하고, 아르메니아 민족에 대한 탄압이 아님이라 주장함. 이들의 견해 차이는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  대규모 충돌의 역사적 맥락

  1. 아르메니아 사회는 오스만 제국 내 농촌과 도시로 나뉘어 있었는데, 도시 거주자 중 일부는 상업 및 금융분야에서 성공을 거뒀으며, 일부는 정부 및 중앙 행정에서 근무하는 건축가나 조폐관 등의 직업을 가졌습니다.
  2. 19세기 중반에 아르메니아인과 이슬람 교도 간에 갈등이 발생했고, 이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을 점령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3.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이 , 외부에서는 아르메니아 독립을 목표로 하는 정당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 관리를 겨냥한 폭탄 테러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4. 러시아 군과 협력하면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소문이 퍼져, 도시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과 튀르키예인·쿠르드족 사이에 적개심이 높아졌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외국과의 연계와 테러리스트로 여겨졌습니다.
  5. 제1차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은 1894년에 비틀리스 주에서 대규모 충돌로 발발하여 수천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이에 유럽 여러 국가가 오스만 제국을 비난하며 개혁 요구를 했습니다.
  6. 제2차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의 동맹 결정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과 미국으로 대규모 이주를 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 박해: 추산되는 희생자 수와 인구 변화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의 추산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인 박해로 20만 명부터 200만 명까지 다양한 사망자 수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오스만 제국 아나톨리아 동부에는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 인구는 비슷했습니다. 그 중 일부는 강제 이주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강제 이주를 겪은 사람은 약 8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60만 명에서 80만 명 사이의 수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견해 충돌과 정치적 파장

현재 이 문제는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에 대한 논쟁에서 긍정과 부정의 견해가 엇갈리며, 역사적 사실의 명확한 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튀르키예 측은 대부분의 희생자가 아르메니아인인 것은 당시 전투와 러시아와의 연계로 인한 불행한 사태라고 주장하며, 초기 희생자는 전투원이나 러시아와 내통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문제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둘러싼 현대적 민족 갈등의 결과로 이해됩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각 나라에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실제로 증명된 사건으로 여기고, 아르메니아 로비가 존재함에 따라 이 문제가 의회에서 비난 결의로 다뤄진 적도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 갈등: 지역 영토 주장과 정치적 분쟁

아르메니아가 소련의 독립 후 튀르키예령 지역 영토 주장, 프랑스의 아르메니아 대학살 부인 법으로 인한 갈등으로 정치적 양상 변화되었습니다. 쿠르디스탄에서 살아남은 옛 아르메니아 거주지는 튀르키예와 쿠르드족 간 관련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2012년 프랑스 의회의 법제로 인해 양국 간 갈등이 높아지며, 튀르키예는 정치적 군사적 관계를 중단했다. 이에 따라,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 간 영토 문제와 정치적 논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영화 더 프로미스(2016)

더 프로미스(2016)"는 1915년의 터키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줄거리는 아르메니아인 의사인 미카엘과 미카엘이 사랑하는 나탈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정부의 대학살 명령으로 그들의 삶은 뒤바뀝니다. 미카엘은 명령에 맞추어 강제로 노동 참여하게 되고, 나탈리는 여행 중에 구출되어 파리로 향하게 됩니다. 미카엘은 터키 내에서 살아남으며, 이후 목격한 가혹한 사건들과 대학살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힘쓰게 됩니다.

이 영화는 역사적 배경 아래 두 주인공의 사랑과 희생을 다루며,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참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이 기간의 역사적 사건을 인간적인 이야기로 전달하며, 희생과 갈등의 중요성과 인류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하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함께 힘을 모아 역사의 참상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더 프로미스 영화에 나오는 감동적인 명대사를 몇가지 정리해봅니다.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 "Even as we watch them die, we have to keep fighting for those who are still alive."

"우리는 사랑을 찾아야 하고, 때로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We must seek love and sometimes defend it."

"마음이 약한 이들이 이길 수 있을까? 우리가 믿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Can the faint-hearted prevail? Where do we place our trust?"

더 프로미스 영화를 통해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전하는 메세지를 정리해봤습니다. 

  1. 억압 받는 이들을 위해 끝없는 투쟁을 펼치는 것이 정의를 지키는 길이다.
  2. 사랑과 불굴의 의지는 역경과 비극에 맞설 때 중요한 힘이 된다.
  3. 용기와 끈기, 인간의 영혼의 힘을 믿어 엄청난 도전을 극복할 수 있다.

더 프로미스를 보고 나서, 영화는 아르메니아의 고통과 이야기를 너무도 감동적으로 전달했습니다.

특히, 엠레 오간이 대사관에 전화하지 않았다면, 크리스 기자가 감옥에서 싸인을 해버리고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지 못했다면, 지금 아르메니아는 존재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에서 이런 선택과 희생을 통해 어떤 가치가 지켜졌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전쟁과 국가 발전에 희생을 감수한 영웅들 덕분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정의를 위한 선택이 우리의 존재와 현재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더 프로미스를 보면서, 지금도 전쟁과 내전으로 수많은 희생자와 난민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쟁의 참상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전쟁은 이어서서는 안 될 비극이며, 영화를 통해 이러한 현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행렬, 아르메니아 대학살 비극

반응형